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여행19

부산 용호동 오륙도 여행및 출사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 앞 바다에 있는 섬. 대한민국의 명승 제24호 부산 오륙도로 지정되어 있다. 조수간만 및 보는 사람의 위치와 방향에 따라 어쩔 때는 5개(서쪽에서 볼 때에), 어쩔 때는 6개(동쪽에서 볼 때에)로 보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방패섬과 솔섬의 아랫부분이 거의 붙어 있어 썰물일 때는 1개의 섬으로 보이고, 밀물일 때는 2개의 섬으로 보인다는 데서 유래하였다는 설은 19세기에 일본 사람이 잘못 기록한 내용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1] 다만 19세기에 일본 사람이 잘못 기록했다는 내용이 아직 주장 수준에서 그친다는 내용도 있다.[2] 가덕도, 을숙도, 영도와 함께 거론되는 부산의 대표적인 섬이며, 최근에는 광안대교나 마린시티 같은 새로 떠오르는 상징들에 약간은 밀린 듯 하지만 자연.. 2023. 2. 23.
부산 문화재 동래부 동헌 탐방및 출사 동헌은 조선시대 수령의 집무공간으로 일명 아헌(衙軒)이라고도 하며, 객사 다음으로 중요한 관아시설로 이청(吏廳),무청(武廳),향청(鄕廳)등 각종 관아 건물의 중심이 되는 중요한 곳이다. 동래는 일본과 최접경지로서 한반도 제일의 관방이자 전략요충지로 중시된 만큼 일찍부터 읍성과 관아가 설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더욱 중시되어 태조 때부터 진을 두고 병마사가 판현사를 겸하도록 하였고, 명종 12년(1547)에 도호부로 승격되어 정3품 당상관으로 부사를 임명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동래에 대한 중요성이 더욱 크게 인식되어 효종 6년(1655) 경주진관에 속해 있던 것을 독진(獨鎭)으로 독립시키고, 관아도 대대적으로 복구하였다. 동래부 관아는 대원군 집권기까지 빈번히 증·개축되다가 고종 3년.. 2023. 2. 22.
부산 동래구 충렬사 탐방및 출사 충렬사는 1592년 일어난 임진왜란 때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부산지방의 순국선열이나 공을 세운 선열을 모신 곳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전쟁이 끝난 뒤인 1605년(선조 38)에 동래부사 윤훤(尹暄)이 동래읍성 남문 안에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의 위패를 모신 송공사(宋公祠)를 지어 매년 제사를 지낸 것이 그 시초이다. 그 후 1624년(인조 2) 선위사(宣慰使) 이민구(李敏求)의 청으로 ‘충렬사’라는 사액(賜額)이 내려짐에 따라 송공사는 충렬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1652년(효종 32) 동래부사 윤문거(尹文擧)가 사당이 좁고 성문 가까이에 있어 시끄럽다는 점과 송상현공의 충절과 학행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 안락리(지금의 충렬사 자리)로 이전하였다. 이때 강당과 동․서재(東西齋)를 지어 안락서원(安樂書院).. 2023. 2. 22.
부산 금정구 범어사 탐방및 출사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금정산 중턱에 있는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이다. 부산지역을 대표하는 고찰이며[1] 해인사, 통도사와 함께 영남 3대 사찰이기도 하다 삼국유사의 678년(문무왕 18년)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금빛이 나는 물고기가 하늘에서 내려와 우물에서 놀았다고 하여 금정산(金井山)으로 이름짓고 그곳에 사찰을 지어 범어사(梵魚寺)를 건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참고로 '범어(梵語)'라고도 알려져있지만 창건 설화에서 물고기가 등장하는만큼 물고기 어 자를 쓴 '梵魚'가 올바른 표기이다.[2] 건물들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버려 10여 년을 폐허로 있다가 1602년(선조 35년) 중건하였다. 그러나 또다시 화재를 당하였고, 1613.. 2023. 2. 22.
반응형